[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⑮ 김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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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⑮ 김필순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22.07.1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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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김필순(金弼淳, 1878-1919)의사, 독립운동가(독립운동 이상촌 건설)
김필순(金弼淳, 1878-1919)
의사,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이상촌 건설)

김필순은 1878년 6월 25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마을)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贍)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서상륜, 서경조 형제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여 소래교회의 첫 세대 교인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과 서양의 근대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소래마을에서 자란 김필순은 1894년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이듬해(1895)에 그는 서울로 유학 와서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그는 영어 학습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한국인 최초의 의사 한국 최초의 서양 병원인 제중원이 발전을 거듭하는 중에, 1904년 병원의 신축 건물이 완공되어서 9월 23일 봉헌식을 거행했다.

의료선교사 에비슨(Oliver R. Avison, 魚丕信, 1860-1956)이 병원시설의 발전을 구상한 지 만 5년 만에 실현된 거사(巨事)였다. 병원 이름은 기증자인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 1838-1913)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기념병원'(Severance Memorial Hospital)이라 지었다. 새로 준공된 세브란스기념병원은 최고의 의료시설을 갖추어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다. 11월 12일 개원식이 끝난 뒤, '만국청년회'(윤치호가 회의 주재) 회원들은 병상에 드는 치료비로 매년 1원씩 기부하기로 했다.

김필순의 학창시절을 보낸 배제학당
김필순의 학창시절을 보낸 배제학당

에비슨은 1893년 11월 제중원의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의학교육에 대한 꿈을 품었다. 의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 의사를 양성하려는 포부였다. 그가 구상한 의학교육은 의사 양성과 함께 간호사, 약제사, 치과의사, 그리고 안경사 등 다양한 의료진을 양성하는 종합의학교였다. 에비슨은 이를 위해 한국인 의료조수를 고용하였고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환자를 진료했다. 조수들의 의료활동은 1895년 콜레라 방역사업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의료인 양성에 자신감을 얻은 에비슨은 의학교 설립에 더욱더 집중해 나갔다. 조수로 선발된 학생들이 이때부터는 의사가 될 목표를 갖고 의학교육을 받았다. 아직 의사 양성을 위한 의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의학교육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 수업연한도 없었고 강의가 규칙적으로 진행되지도 못했다.

김필순과 졸업생들
김필순과 졸업생들

1903년 세브란스기념병원에서 의학교육 및 의사자격증 수여를 관장하는 '의료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가 학칙과 교과과정을 만들었다. 1905년에 이 위원회가 학제를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의학교육의 제도가 마련되었다. 또 그 이듬해(1906) 연말에는 의학교육을 받는 학생 수가 16명이었다. 이 가운데서 이미 상당한 훈련을 받은 학생이 7명이었다. 이들을 졸업시키려고 생각한 에비슨은 1908년에 각 과목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시험문제로 100개씩 만들어서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만일 학생들의 시험성적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이들을 졸업시키기로 했다. 시험문제의 수준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치르는 의사시험에 버금갔다. 시험에 응시한 7명 모두가 합격했다. 평균 점수가 83점이었다. 에비슨은 대단히 만족했고, 더욱이 학생들의 실기시험 성적은 필기시험과 구두시험 성적보다 훨씬 더 우수했다. 게다가 학생들의 자세와 태도도 크게 칭찬할 만했다.

모두 다 졸업 후에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살기보다는 남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돈벌이보다는 학교에 남아서 후학을 가르치겠다고 대답했다. 학생들 모두 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의사가 된 것이었다.

의사양성에 혼신의 힘을 쏟은 에비슨의 노력에 열매가 맺혀서 1908년 6월 3일 의학교에서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한국에서 서양의학교육의 첫 결실이자 서양의학의 신기원(新紀元)이 열렸다. 제1회 졸업생 7명은 김필순(金弼淳), 홍석후(洪錫厚), 박서양(朴瑞陽), 주현칙(朱賢則), 김희영(金熙濚), 신창희(申昌熙), 홍종은(洪鐘殷)이었다. 이들의 졸업장에는 ‘의학득업사’(醫學得業師, Doctor of Medicine and Surgery)로 명시되었다. 졸업식 다음 날, 졸업생 7명은 대한제국 정부의 내부 위생국으로부터 ‘의술개업인허장’(醫術開業認許狀)을 받았다.

에비슨의 조수였던 김필순은 1909년 의학교에서 전임교수로 일했다. 그는 해부학과 생물학을 강의했고, 위생학과 외과학은 에비슨과 분담하여 강의했다. 그는 외과(外科)의 부의사(assistant physician)로 임명되었다. 1911년에는 병원 외래병동 책임자가 되었다.


의학교과서 번역

김필순이 학창시절 작성한 해부학 교과서
김필순이 학창시절 작성한 해부학 교과서

김필순이 의사가 된 당시에는 한글로 제작된 의학교과서가 전무(全無)하였다. 에비슨은 김필순과 함께 해부학 교과서의 번역에 착수했다. 의학교과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은 곧 서양의학의 토착화 작업이었다. 교재번역에는 의학용어와 그 개념을 한글로 고안하여 옮기는 작업이 병행되었는데, 이를 위하여 중국과 일본의 서양의학 번역서를 참고해야 했다. 김필순이 이러한 작업을 하면서 약 이름과 질병 이름, 그리고 의학에 사용되는 일본식 표현을 크게 참조했다. 그 결과 3권의 <해부학》이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중국 서간도 통화현 등지에서 이상촌 건설

1907년 8월에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의 강압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지휘관 박성환이 부하들을 집합시켜 놓고 연설을 한 다음 단총의로 자결했다. 이 장면에 충격을 받아 격분한 군인들이 중무장을 하고 일본 수비대를 급습했다. 양 진영의 군인들이 충돌하여 격전이 일어났다. 이때 세브란스병원의 의사들과 의료조수들이 적십자 표를 가슴에 달고 나가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병원으로 호송했다. 병원안은 부상자와 시체들로 차고 넘쳤다. 이러한 경험이 김필순으로 하여금 장차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김필순이 근무한 서양식건물 병원
김필순이 근무한 서양식건물 병원

김필순은 1907년경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을 조작한 일제의 검거를 피하여 세브란스병원과 서울을 떠났다. 그는 중국으로 갔다. 그는 안창호와 연대하여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서간도 통화현(通化縣)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신민회의 이회영 등이 독립군 기지를 건설했고 또 한국인 거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김필순은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그는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했는데, 그 이상촌의 위치는 왕래가 편한 철도역 근처나 부둣가여야 하며, 이상촌은 집과 학교와 병원과 도서관 등의 근대시설을 갖춘 마을이어야 했다. 마을의 경제는 농업 중심으로 하고, 주민들이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되 공동 농사작업을 하며, 농기구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마을 공동 창고를 설치하며, 공동 목욕탕에서 하루 종일 농사로 지친 육체의 피곤을 풀게 하고자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주민들이 야학교에서 배우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실력을 양성하게 하고, 또 모든 가정의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고, 아픈 사람은 무료로 병원에서 진료 받는 이상촌을 꿈꾸었다. 동네 치안 또한 스스로 유지하고, 마을에 소비조합을 설치하도록 구상했다.

그런데 통화현이 점차 일제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자, 김필순은 1916년 몽골 근처의 제제합이(치치하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병원을 개업하였고, 또한 넓은 땅을 구입하여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선 청년들을 그곳으로 모이게 하고 그곳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했으며 그의 구상은 실천으로 옮겨졌다. 러시아제 농기구를 구입하고 한국에서 건너온 농민 30여 가구를 받아들였다.

1919년, 제제합이(치치하얼)에서 국내외 3·1만세운동의 소식을 들은 김필순은 이상촌 건설 사업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 당시 병원 운영이 성황을 이루어서 크게 확대되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명의 의사와 간호사를 채용하여 병원 일을 했다. 그는 병원에서 얻는 수입 전부를 이상촌 건설과 독립운동 자금으로 투입했다. 그런데 그해(1919) 9월 1일(음력 7월 7일) 그는 일본인 의사(일제의 특무요원으로 추정)가 준 우유를 마신 뒤 이역만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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