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⑯ 이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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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⑯ 이태준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22.07.31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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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이태준 (李泰俊, 1883-1921)의사(몽골의 슈바이처), 독립운동가
이태준 (李泰俊, 1883-1921)
의사(몽골의 슈바이처), 독립운동가

몽골의 슈바이처가 되다

이태준은 1883년 11월 21일 경남 함안에서 아버지 이찬(李璨)과 어머니 박평암(朴平岩)의 슬하에서 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원일(元一)이고, 호를 대암(大岩)이라고 불렀다. 이태준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배웠고, 당시 풍습대로 일찍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 1906년 부인이 사망하자 상경하여 세브란스병원 앞에 있던 김형제상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마침 이 상회의 주인이 김필순(金弼淳)이었다. 김필순은 제중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중이었으며, 도산 안창호(安昌浩)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여서 김형제상회는 독립지사들의 비밀 회합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태준은 1907년 8월 1일 일본군에 의한 강제 해산에 맞서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당한 한국 군인들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영향으로 이태준은 24세 때인 1907년 10월 1일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하였고, 3학년 때인 1910년 2월에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던 안창호의 권유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담하였다. 이태준은 모교에 남아 후학을 가르치기를 원했으나, 1911년 일제가 소위 105인 사건을 조작하고 김필순도 검거대상에 포함되자 12월 31일 김필순이 망명길에 올랐고, 뒤이어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태준도 급히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태준은 남경에서 중국인 기독교인의 도움으로 기독회의원(基督會醫院) 의사로 취직했지만 1914년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의 울란바토르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김규식은 몽골에 군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이어서 함께 갈 동지가 필요했는데, 김규식과 이태준의 몽골행에는 후일 비행사가 되는 서왈보(徐曰甫)라는 애국청년도 동행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국내 비밀결사에서 약속한 자금이 도착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으며, 이태준은 울란바토르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업했다. 이때부터 이태준은 몽골인의 70-80퍼센트가 감염되었던 화류병(花柳病, 성병)의 절멸에 지대한 공헌을 함으로써, ‘까우리(高麗) 의사’ 이태준은 울란바토르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몽골인의 이태준에 대한 존경심은 마치 ‘신인’(神人)이나 또는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을 대하듯 했다. 1919년 7월 몽골 국왕 보그드 칸(Bogd Khan)은 이태준에게 국가훈장을 수여했는데, 이 훈장은 ‘귀중한 금강석’이란 뜻을 가진 ‘에르데니-인 오치르’라는 명칭으로서 제1등급에 해당하는 훈장이었다.

한편 피혁업에 종사하던 김규식은 1918년 5월경 앤더슨 마이어(Anderson Myer) 회사의 지점을 개설하기 위해서 울란바토르로 오는데, 이태준은 이때 김규식을 따라온 그의 사촌여동생 김은식(金恩植)과 재혼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

이태준은 근대적 의술을 베풀면서 몽골사회에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 라마교 영향으로 병에 걸리면 기도드리고 주문이나 외우는 미신적인 치료법만 알고 있던 몽골인에게 근대적 의술을 펼친 그의 인기는 높았다. 몽골 왕궁에 출입하면서 국왕 보그드 칸의 어의가 되었으며, 몽골 왕족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또 몽골 주둔 중국군 사령관 가오 시린(Gao Silin)의 주치의로도 활약했다. 그는 이러한 대인관계와 신뢰를 바탕으로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특히 장가구(張家口)에서 십전의원(十全醫院)을 개업하던 세브란스 동문 김현국(金賢國)과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장가구와 울란바토르 사이를 오가는 애국지사들에게 숙식과 교통을 비롯한 온갖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태준 선생 편지
이태준 선생 편지

그는 또 각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김규식이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될 때 2천 원을 지원했으며, 그해 9월에는 조국의 수해소식을 듣고 은(銀) 10원의 의연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 인천 이씨 족보에는 이태준이 상해임시정부의 군의관 감무(監務)로 활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태준의 활동 가운데 특별히 주목할 것은, 한인사회당이 소비에트정부로부터 확보한 코민테른 자금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운송에 깊숙이 관여한 일이다. 이태준은 한인사회당 연락을 담당한 비밀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모스크바 자금의 운송에 참여했다.

1920년 여름 모스크바의 레닌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의 지원을 약속하고, 1차로 40만 루블의 금괴를 한인사회당 코민테른 파견대표 박진순(朴鎭順)과 상해 임정 특사인 한형권(韓馨權)에게 지급하였다. 박진순과 한형권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해 금괴상자를 베르흐네 우진스크(Verkhne-Udinsk)까지 운송했다. 이들은 6만 루블을 모스크바로 귀환하는 한형권의 활동비로 지급하고, 34만 루블은 두 경로로 나누어서 12만 루블은 김립(金立)이 몽골을 통해, 나머지 22만 루블은 박진순이 만주를 통해 상해로 운반키로 했다. 이때 김립이 책임진 12만 루블이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자, 1차분 8만 루블은 김립이 이태준의 도움을 받아 울란바토르, 장가구, 북경을 거쳐서 1920년 초상해로 성공적으로 운반했으나, 2차분 4만 루블은 이태준이 보관하던 중, 후일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일당에게 이태준이 잡혀 피살되면서 분실되고 말았다.

 

한몽 친선의 가교가 되다

1921년 이태준은 38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직전 북경에서 김원봉(金元鳳)을 만난 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했다. 당시 의열단은 우수한 폭탄제조 기술자를 급히 찾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이태준이 폭탄 제조 기술자인 마자르를 의열단에 소개해 주기로 약속했다. 마자르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포로가 된 헝가리인으로서, 이태준의 자동차 운전수로 울란바토르에 머물면서 장가구와 울란바토르를 왕래하던 독립운동가에게 교통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이태준은 이극로(李克魯)와 함께 1920년 10월 북경을 떠나 장가구까지 갔으나, 그곳에 ‘백당의 난리’로 울란바토르로 들어가는 길이 막혀 여러 날을 기다려도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극로는 북경으로 되돌아왔으나, 이태준은 며칠을 기다린 후에 울란바토르로 들어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이극로가 말한 ‘백당의 난리’는 1920년 10월 러시아 운게른 부대가 중국군이 주둔하던 울란바토르를 공략한 사건을 말한다.

이태준이 피살된 뒤 마자르가 홀로 북경으로 김원봉을 찾아왔다.

마자르가 성능이 우수한 폭탄들을 제조하자 의열단은 더욱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황옥(黃鈺) 경부 사건’, ‘김시현(金始顯) 사건’을 비롯한 의열단의 각종 파괴공작에 활용되었다.

울란바토르에서 압송된 이태준은 운게른 군대의 위수사령관 시파일로프(Sipailov)의 특별감시 대상으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이태준은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히 협력했다는 혐의로 유죄가 인정된 상태였다. 운게른의 부관을 지낸 마케예프(A.S. Makeev)의 회상록에 따르면, 이태준은 운게른의 부하들에 의하여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운게른의 사형집행조에 의하여 잔인하게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태준의 짧고 극적인 일대기는 당시 독립운동가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여운형은 1921년 가을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러시아로 가던 중 이태준의 묘를 찾아서 애도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대암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대암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

이태준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뿐 아니라 한국과 몽골을 연결하는 민간외교의 가교이기도 하다.

1994년 7월 1일 울란바토르에는 연세몽골친선병원이 세워졌다. 이곳에서 신인(神人)으로 추앙받던 이태준이 사망한 지 73년이 지난 후 그의 모교 세브란스병원 의료진에 의해 세워진 연세몽골친선병원은 1989년 몽골 민주화 이후 세워진 최초의 외국 의료진에 의한 종합병원으로 각광을 받았다. 이어 2001년 7월에는 이태준 기념공원이 준공되었고, 2010년에는 몽골대사관 주도로 이태준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이를 통해 조국광복을 위해 항일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이태준이 한몽 친선의 상징적 인물로 부활하게 되었다.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이태준)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야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이다.”

- 여운형, 《몽고사막 여행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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