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④ 이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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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④ 이기풍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19.07.1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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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이기풍(李基豊, 1868-1942)목사(제주도 선교), 순교자(신사참배 거부)
이기풍(李基豊, 1868-1942). 목사(제주도 선교), 순교자(신사참배 거부)

 

필자가 이기풍의 증손 이준호와 함께 제주도에 있는 그의 기념관에 비치된 호적등본을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기풍(李基豊)의 출생년도는 1868월 11월 21일이다. 그의 출생지는 평양부 순영리이며, 부친 이제진(李濟鎭)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기풍은 6세 때 많은 한자를 외웠고, 12세 때는 백일장 대회에서 붓글씨로 장원이 될 정도로 어릴 적부터 총기가 남달랐고 학문과 문예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기풍이 총명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할아버지 이춘배(李春培)가 홍경래의 난에 연루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기풍의 부친 이제진은 정3품 무관 출신인 이춘배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이춘배가 홍경래의 난에 가담한 후 역적으로 몰리면서 구월산으로 도망하자, 부친 이제진은 평양 동대문 밖에서 농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가정 재정이 매우 어렵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졸이 목사 되다

이기풍이 기독교 신앙으로 개심하기 전의 직업은 포졸이었다. 석전 패거리의 우두머리니 깡패였다느니 하는 자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성격이 괄괄한 편이었고, 당시 서구사회와 서양종교(기독교)에 대해 편견이 있어서 평양에서 마펫(S.A. Moffett,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졌다. 포졸 신분으로서 정부가 인정하여 입국한 선교사에게 돌을 던졌다는 것은 의아한 사건이지만, 이것이 사료가 말하는 사실이다. 이 사건에 대해 마펫은 “내 턱 아래 흠 있는 것을 보고 돌에 맞았다고 하나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개심과 신학교육

이기풍은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평양에 거주할 수 없어서 원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서 담뱃대 등에 그림을 그려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중 스왈렌(W.L. Swallen)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고 1896년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스왈렌 선교사의 조사(助師, helper)가 되어 원산과 함흥 등을 순회하면서 신앙서적도 팔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899년 스왈렌 선교사가 평양으로 옮기자 함께 평양으로 돌아와서 황해도와 충청도 지역을 조사 신분으로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가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190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기풍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6개월간의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조사 신분으로 스왈렌 선교사와 함께 황해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신학생들이 방학기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시 평양신학교의 실천신학 수업의 하나이기도 했다.

 

목사안수와 제주도 파송

한국인 최초의 7인의 목사. 뒤쪽 오른쪽에서 첫번째가 양전백.
한국인 최초의 7인의 목사. 앞줄 좌측에서 두번째가 이기풍 목사.

평양신학교는 1907년 7월 장로회신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이 제1회로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7인(이기풍, 길선주,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서경조)의 목사들이다. 이들에 대한 목사 임직식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독노회기간에 거행되었다. 이기풍은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내지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목사안수를 받기 전에 이미 자신이 가겠다고 지원한 상태였다. 그래서 독노회는 목사 안수식이 끝나자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제주도(Quelpart) 선교와 철수

이기풍 목사 가족사진. 사진=제주성안교회 홈페이지.
이기풍 목사 가족사진. 사진=제주성안교회 홈페이지.

이기풍은 조사 1명과 아내(윤애함), 그리고 어린 이사은과 함께 1908년 1월 17일 평양역을 출발하여 서울 남대문에 도착, 승동교회에서 7일 동안 머문 후 1월 24일 목포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목포에서 2월 중순까지 체류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동안 목포지역을 중심으로 부흥회와 신학훈련반 강의를 했다.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은 말을타고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여 서문통(성내)교회(1908), 성읍교회(1908), 금성리교회(1908) 등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던 중 성대(聲帶)에 이상이 발생하여 치료차 1915년 육지로 철수했다.

제주도를 선교사들이 퀠파트(Quelpart)로 부른 것은 《하멜 표류기》에서 하멜이 가파도를 퀠파트라 한 것을 유럽인들이 제주도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육지에서의 사역

제주도에서 철수한 이기풍은 건강을 회복하자 1916년 8월 25일 제6회 전라노회의 허락으로 광주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광주중앙교회, 광주양림교회)에서 사역했으나 병이 재발하자 휴직 청원서를 제출했다. 1920년 건강을 완전하게 회복한 이기풍은 광주제중병원(1918-1919)과 순천읍교회(1920-1924)를 말씀으로 섬기다가 고흥읍교회(1924-1927)를 담임하였다. 고흥읍교회를 담임하던 중 제주도 성내교회가 이기풍을 담임목사로 급하게 요청하자 이에 응하여 제2차 제주도 사역을 시작했다.

이기풍은 1930년까지 성내교회를 담임목사로 섬기면서 여러 교회를 살피는 일을 겸하였다. 1931년 이기풍은 성내교회를 후임자에게 맡기고 육지로 철수하여 벌교지방 교회들을 담당하다가 1933년부터는 벌교리교회(현 벌교대광교회)를 중심으로 주변 교회들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37년 11월 16일 제21회 제2차 순천노회 임시노회 이후부터는 벌교(읍)교회만 시무하였고, 1938년 1월 7일 순천성경학교에서 개최된 제21회 제3차 순천노회 임시노회에서 벌교읍교회를 사임하고, 여수 남면 우학리교회로 부임하였다.

이기풍은 개교회뿐만 아니라 노회와 총회를 섬기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1920년 9월 4일 목포 양동예배당에서 개최된 제6회 전남노회는 이기풍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정하였고, 1921년에는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1933년 6월 6일 순천읍예배당에서 개최된 제17회 순천노회에서 노회장에 선임되었다.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이기풍은 우학리에서 목회하던 1940년 11월 15일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서 고초를 당하였다.

일경은 72세의 고령인 이기풍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죽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1941년 4월 병보석으로 그를 석방하였다. 이기풍은 석방되어 우학리교회로 돌아와 목회를 계속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약해져 1942년 6월 20일 소천하였다. 그가 석방되어 소천했으나 고문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므로 그의 죽음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순교였다. 그의 유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었다가 1953년 광주기독묘지에 이장되었고, 1988년 4월 1일 광주제일교회가 관리하는 제일동산 당회장 구역으로 이장되었다.

 

글 김호욱

(광신대학교 역사신학교수, 한국기독교문화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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