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⑬ 진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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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⑬ 진덕기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22.04.1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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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전덕기(全德基, 1875-1914)목사, 독립운동가(상동학원∼신민회)
전덕기(全德基, 1875-1914)
목사, 독립운동가(상동학원∼신민회)

민중 전도자 전덕기

전덕기는 1875년 12월 8일 서울 정동에서 부친 전한규(全漢奎)와 모친 임씨(林氏) 슬하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9세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숙부 전성여(全成汝) 집에서 자랐다. 전성여가 남대문시장에서 숯 장사를 했기 때문에 전덕기도 숯을 팔며 무척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서양 선교사에 대한 호기심과 적개심으로 스크랜튼(W.B.Scranton)의 집 유리창을 돌팔매로 깨뜨렸는데도 불구하고 미소로 용서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전덕기는 스크랜튼이 운영하는 시병원(施病院)의 고용인으로 일하며, 1896년 스크랜튼에게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후 스크랜튼 부부를 도와 상동교회 설립에 참여하였고, 교회 일에 열심히 봉사했다. 1902년 감리교선교부로부터 상동교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는 열정적인 선교활동으로 ‘민중의 전도자’로서 이름을 알렸다.

상동교회가 보이는 1920년대의 남대문시장과 명동일대.
상동교회가 보이는 1920년대의 남대문시장과 명동일대.

상동교회가 위치한 남대문시장 일대는 빈민가로 전염병이 자주 돌아 사람이 죽어도 병이 옮을까 두려워 누구도 장례를 치르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전덕기는 부패한 시체에서 흐르는 물 때문에 나막신을 신고, 악취를 제거할 쑥 가루와 약식 관(棺)을 준비했다가 버려진 시체를 찾아 장례를 치르는 일을 자원했다. 이런 희생적인 헌신은 민중들의 열렬한 호응과 존경을 받았고, 주위에 많은 사람이 따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복음을 ‘억압과 차별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이해하였으며, 전도의 목표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가 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고통당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는 것”으로 삼았다. 1907년 목사안수와 동시에 상동교회에 부임했다.

상동교회
상동교회

초기 한국교회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민중의 전도자’로서 전덕기의 사상과 헌신은 그가 어린 시절 남대문시장 숯장수로 알려진 숙부 집에 살면서 민중의 삶을 직접 체득하였고, “민중이 있는 곳”(“where people is”)으로 불리던 시병원에 근무하며 스크랜튼의 예수 사랑을 실천적으로 경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시병원에 관한기록이다.

우리가 상대해서 치료한 사람들은 거의가 극빈자들이었으며, 종종 버림받은 사람들도 돌보아 주어야 했습니다. 특히 버림받은 사람은 그 몸의 상태가 도저히 일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을 경우에는 치료받는 동안에 생활비 전체를 우리가 부담해야만 했습니다.” - 〈감리교 의료 선교부 연례보고서〉(1887)

 

독립운동가 전덕기

상동교회는 구한말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그 중심에는 엡윗청년회와 청년학원이 자리하고 있다. 엡윗청년회는 1897년 5월 제13회 미 감리회 한국선교연회의 결정으로 창립된 청년단체로서, 상동교회 엡윗 청년회는 그해 9월 결성되었다. 전덕기가 회장, 박용만(朴容萬)·정순만(鄭淳萬) 등이 임원이었는데, 1년 전에 독립협회에서 실패한 경험을 공유한 이들은 독립협회 해산으로 흩어진 우국지사들을 규합하는 데 주력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에 상동교회에 모여 예배와 기도를 간단하게 드린 후에 시사 토론을 진행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의논하고 실행했다. 엡윗청년회는 전국 회원이 3-4천 명에 달했고, 당시 김구(金九)는 황해도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상동청년회가 주목받게 된 것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부터이다.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후 기념촬영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후 기념촬영

이들은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구국기도회를 열어 반대여론을 조성하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도끼 상소’와 종로에서의 대중 집회를 결행했다. ‘도끼 상소’는 상소를 들어 주지 않으려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의미였다. 이준(李儁)이 대표 상소자로 나섰고, 정순만과 이희간(李喜侃)은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의 집에 들어가 칼을 들이대며 결사반대할 것을 압박했다. 조약체결에 앞장선 을사오적을 처단할 요량으로 평안도 출신 장사 수십 명을 서울로 불러서 암살단을 조직했으나 경찰의 경계로 성사되지 못했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친일파인 해리스 감독을 통해 스크랜튼에게 상동(엡윗)청년회의 해산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헤이그 특사. 왼쪽부터 이상설, 이준, 이위종
헤이그 특사. 왼쪽부터 이상설, 이준, 이위종

이 일로 스크랜튼과 전덕기 사이에도 불편한 관계가 조성되었다. 결국 스크랜튼의 담임목사직 사임과 함께 상동청년회는 해산되고, 스크랜튼의 추천에 의해 전덕기가 후임 목사로 취임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상동청년회는 해산되었지만 이들은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에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전덕기는 헐버트로부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이회영(李會榮)과 협의하여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상소했다. 그뿐 아니라 밀사로 파견된 이상설(李相卨), 이준과 이들을 도운 정순만, 박용만이 모두 상동 청년회의 핵심이었다.

한편 전덕기는 최병헌(崔炳憲), 스크랜튼 등과 상동교회에 초등과정의 공옥학교를 설립했다. 1898년경의 일이다. 1904년에는 3년제 중등과정의 청년학원을 설립하고 국어·수학·영어·한문·국사·세계사·교련 등을 가르치며 분야별 전문가들로 교사진을 구성했다. 1907년에 4년제로 개편하고 전문 지식인 양성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전덕기는 성경을 가르쳤고, 이승만이 잠시 원장을 맡았다. 이회영, 남궁억, 조성환, 최남선, 장도빈, 노병선, 이중화 등 당대를 대표하는 민족주의자들이 교사로 참여했다. 엡윗청년회와 청년학원을 통해서 상동교회를 출입하는 인사들을 망라하여 상동파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초기 독립운동사의 중추를 이루는 거대한 산맥이었다.

 

목회자 전덕기

상동 청년학원은 부설 야학을 운영하고 여성지 〈가정〉, 수학 전문지 〈수리학〉을 발간했다. 주시경이 운영하던 조선어강습소는 한글 보급의 거점이었고, 하기 조선어강습회는 수백 명의 우국지사들이 전국에서 모여 독립운동의 방략을 소통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07년 상동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비밀결사 신민회가결성되었다. 발기인은 안창호·양기탁·유동열·이갑·이동녕·이동휘·전덕기 등 7인이며, 미국에서 갓 귀국한 안창호를 제외하면 모두 상동파 인사이다. 이때 전덕기는 신민회 재무와 서울 총감을 맡았다.

1910년 ‘안명근 군자금 모금사건’(안악사건)을 통해 조직의 일단이 드러나자,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을 조작하여 600여 명을 검거한 후에 122명을 기소했다. 1심에서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1913년 대구복심법원은 99명을 무죄로 석방했다. 재판부가 조작된 사건임을 인정한 결과였다.

전덕기도 체포되었다가 3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고문으로 얻은 병을 회복하지 못하고 1914년 3월 23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도 부음을 알렸다. “슬프다, 오늘 세상을 떠난 전덕기 씨여”로 시작된 기사는 23줄이나 되는 장문이다. 총독부에서조차 외면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상동교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애국지사는 물론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장사꾼, 천민, 창기들까지 몰려와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는데, 그 행렬의 길이가 10리를 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전덕기의 영향이 워낙 큰 탓으로, 목회자로서 전덕기의 모습은 늘 감추어져 있었다. 다행스럽게 1904년 〈신학월보〉에 실린 “마땅히 깨울 일”(롬 13:11)이 남아 있어서 그의 신앙과 사상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는 성령(聖靈)만이 이 민족의 진정한 독립과 자주독립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개인의 영적 구원보다도,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민족이 깨어나 인간적·사회적으로 제구실하는 백성이 되는 사회구원에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목회와 선교를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전덕기 목사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동교회는 전국 최대 감리교회로 부상했고, 7년의 목회 동안 6개 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그의 고매한 신앙 인품은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되었다. 다음은 육당 최남선의 술회이다.

“안창호 이승훈 등은 지극히 존경하나 순수한 기독교 신자라고 볼 수 없다. 순기독교 신자는 전덕기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상동교회 목사로서 열렬한 신앙가요 동시에 애국자였다. 내게는 그의 감화가 크다.”

최남선의 말대로 열렬한 신앙가이면서 애국자였던 전덕기의 39년 인생은 목회가 애국이고, 애국애족의 길을 목회로 실천하였던 교회와 사회의 일치를 위한 삶이었다. 그는 위대한 민족운동가이자 민중 전도자로서 큰 자취를 남긴 한국 현대사의 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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