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⑪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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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⑪ 유길준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22.03.2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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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유길준 (兪吉濬, 1856-1914)개화파, 언론인, 저술가(《대한문전》 발간)
유길준 (兪吉濬, 1856-1914)
개화파, 언론인, 저술가(《대한문전》 발간)

초기 교육

유길준은 1856년 10월 24일 서울의 부촌이며 양반들이 주로 살았던 북촌의 계동에서 태어났다. 유길준의 할아버지 유치홍은 청송부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유진수는 종 9품의 참봉을 지냈다. 어머니는 한산 이(李)씨이며, 그의 외조부는 고려 말 충신인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종 4품 도정 벼슬을 지냈고 학식이 높고 부유한 가정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매우 영특하여 암기력이 뛰어났고 스스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유길준이 11세 되던 해인 1866년 프랑스 신부 9명을 처형한 사건으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점령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한양에서는 외세의 침략에 따른 공포로 물가가 오르고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유길준의 가족도 피난을 떠났는데, 경기도 광주에서 지내다가 3년간의 피난살이를 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외조부 밑에서 사서삼경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과거를 볼 준비를 해나갔다.

유길준의 나이 15세가 되던 1870년 경주 김씨와 혼인을 하였다. 그리하여 처가가 있는 청주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돌아온 후에는 낙산 서재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때 잠시 민영익과 함께 공부하게 되는데 민영익은 유길준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된다.

 

박규수와의 만남

유길준은 1873년 박규수를 만나면서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박규수는 일찍이 청나라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기행문으로 남긴 연암 박지원의 손자였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가 중무장을 한 채로 대동강까지 들어와 화포 공격으로 불타게 되는 사건 당시 박규수는 평양 감사로 있었다.

박규수는 1840년대 후반 중국에서 전래된 웨이위안의 《해국도지》를 유길준에게 주면서 읽기를 권하고, 앞으로는 외국의 정세를 모르면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유길준은 외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유길준은 향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대과에서 번번이 떨어지자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과거제도의 폐단을 들어 폐지를 주장했다. 그리고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젊고 쟁쟁한 명문가의 젊은이들과도 많이 교류하였는데, 그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김윤식 등이었다.

 

일본 유학과 <한성순보> 발행

개화사상가들
개화사상가들

고종은 1881년 봄에 일본의 개화 문명을 탐색하고자 대규모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였다. 유길준은 조사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대장성 시찰임무가 주어졌고, 윤치호 등과 함께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일본 동경에 도착한 후 유길준과 유정수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는 경응의숙(게이오대학의 전신)에 입학하여 한국 최초의 일본 국비 유학생이 되었다.

그가 눈여겨보았던 것 중 한 가지는 신문이었다. 신문이 백성의 소리를 정부에 전달하고, 정부의 정책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데 활용되는 중요한 통로라고 생각하며 신문 발행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박영효의 주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문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유길준은 <한성순보>가 순한문으로만 발행되는 등 한자로만 발행되는 많은 서적이나 글들이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자신의 작품 《서유견문》(西遊見聞)은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여 1895년에 발간하였다. 《서유견문》은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여 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여행기이다.

 

미국 유학과 갑신정변

유길준 선생이 사용했던 세면도구함. 고려대 박물관 제공.
유길준 선생이 사용했던 세면도구함. 고려대 박물관 제공.

 

유길준은 1883년 <한성순보> 발행이 중단되자 그해 7월 16일 미국으로 파견되는 사절단 보빙사의 일원인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다.

보빙사 일행은 임무를 마치고 1883년 11월 10일 귀국길에 올랐으나 29세의 유길준은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 국비 유학생이 되어 미국에 남았다.

유길준은 1884년 인근에 있는 덤머 아카데미(Governor Dummer Academy)에 3학년으로 편입학하여 미국의 법도와 예절, 학교제도, 농업, 공업, 상업, 학문, 법규 등을 배웠다. 유길준이 하버드대학에 진학하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고국 조선에서는 1884년 12월 6일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그의 후원자 민영익이 개화파의 칼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갑신정변 후에 세력을 회복한 민씨 세력은 외국에 유학 중인 학생들에게 귀국을 지시하고 학비 조달을 중단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미국에 체류할 수 없었다.

그가 1885년 12월 16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자, 개화파의 일원으로 간주한 정부는 그를 체포하여 포도청에 감금한 후 한규설의 집에 연금시켰다. 한규설의 집에서 1년 반을 지낸 후 알렌 선교사의 치료로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민영익의 배려로 가회동에 있는 민영익의 산장(취운정)으로 옮겨 7년간 그곳에서 비교적 편안한 연금생활을 했다.

유길준은 영어소통이 가능하고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이 있어 연금되어 있는 동안에도 정부의 자문역할을 하였다.

 

제3차 갑오개혁과 망명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여파로 시작된 갑오개혁은 3차에 걸쳐 진행되었고, 제3차 갑오개혁은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2일까지 추진되었다. 박영효의 망명과 더불어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제3차 갑오개혁은 유생들의 단발령(斷髮令) 반대와 1896년 2월 11일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김홍집, 유길준 내각이 붕괴되면서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국왕과 왕세자에게 모범을 보이라며 왕세자의 머리를 잘랐던 유길준은 나라의 역적이 되어 일본으로 망명했다.

 

기독교 신자로 개종과 계몽운동

유길준이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은 오랜 친구인 윤치호의 도움이 있었고, 또한 동경의 YMCA(기독청년회)의 총무로 온 김정식이라는 사람이 유길준이 기독교를 믿도록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식은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과 함께 종로 감옥에 있으면서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인물이다.

순종은 1907년 유길준을 특별 사면했다. 특별 사면을 받고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국민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모든 국민을 선비로 만들겠다는 ‘흥사단’ 같은 사회단체의 결성에도 앞장섰다. 그가 일본에 있을 때 우리말 문법의 체계를 세운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완성하였는데 귀국한 후 1909년에 발간하였다. 그는 한성부민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계산학교, 노동야학회 등을 설립해 국민 계몽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만들어 국가 산업 발전에 힘을 쏟았다.

한일병탄 이후 그는 매우 허탈하여 거의 바깥출입을 삼가고 모든 공직을 사직하고, 교회만 다니다가 지병인 신장염으로 1914년 9월 30일 5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임종 시 아들과 조카에게 신약성경을 읽게 하였으며, 유족들에게 살아서 이룩한 공이 없으니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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