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법석의 시대, 타작마당의 은혜로 일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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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법석의 시대, 타작마당의 은혜로 일어서자
  • 발행인 채영남
  • 승인 2022.02.17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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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시끄럽다.

대통령 선거가 50여일도 남지 않게 되면서 세상에 울려 퍼지던 소리는 점차 소음에 가깝게 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두 어깨는 잔뜩 움츠리게 되고 패인 주름은 깊어져 가건만, 달라도 너무나도 다른 세상이자 다른 일들만 같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코로나 여파로 물러설 곳이 없을 만큼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이들이 무너지면 국가 경제는 희망을 찾기 어렵게 된다.

전체 사업체의 93%, 전체종사자 수의 43%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니 국민 대다수가 느끼는 위기감은 심각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어디 이뿐이랴.

북한의 군사도발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대통령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현상으로 단정 짓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만큼 북한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붕괴는 대한민국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지금 당장 한반도에서 세계 전쟁이 발발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동북아에서 세계 군사 강국들의 긴장과 대치도 문제다.

중국의 패권 행보와 러시아의 군사적 팽창에 맞선 서구의 견제 및 봉쇄로 전쟁 위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인생에 무엇이 귀에 들어오겠는가?

경천동지(驚天動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희망은 뒤로하고 사면초가(四面楚歌)요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되는 요즘이다.

대선 주자들의 정책과 주장도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 했듯이 그들만의 세상 이야기로 느껴질 뿐이다.

정부의 정책이나 주장들도 탐탁치 않게 느껴지는 것도 세상인심이다. 현실성이 없어 보이거나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탓이다.

듣기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싫다고 했다. 하물며 싫은 말은 오죽하랴.

그야말로 야단법석의 시대다.

익히 알다시피 야단은 야외에 세운 단을 의미하며, 법석은 불교에서 불법을 펴는 자리를 뜻한다.

설법을 듣겠다며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질서가 없어지면서 어수선하게 되니 목적한 바를 어찌 이룰 수 있겠는가.

세상 이치가 그렇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속 빈 강정일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야단법석의 시대는 교회가 복음으로 세상을 이롭게 할 사명을 부여받은 시대다. 더하여 추락한 한국교회가 복음으로 새로워질 절호의 기회다.

한국교회는 이제 세속의 이해와 가치, 주장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해서는 안 된다.

복음으로 새롭고 이롭게 다시 일어서야 한국교회의 미래도 있다.

복음이 있어야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야단법석으로는 안된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것들 모두 벗어 던지자.

무엇보다 복음을 위한 공론의 장, 타작마당으로 모이자.

오르난의 타작마당의 예와 같이 한국교회가 회개하자.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의 용서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의 해법이 보이기 때문이다.

회개를 해야 용서하시고 제물을 열납하시는 증거인 은혜의 단을 쌓을 수 있지 않겠는가.

더하여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순종의 제단을 쌓아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과 일련의 현상들로 한국교회에 중대한 신호를 보내셨다.

대표적으로 코로나 사태를 들 수 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오면서 처참한 수준으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복음은 외면받는 것을 넘어 조롱의 대상이 됐고, 전도의 문은 닫혔다.

일부 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이제 그동안 외면하거나 방치했던 문제들을 되돌아보자.

다소 황당하다 할지라도 귀를 기울여보자. 자존심이 상하여도 무릎을 꿇자.

갓을 통해 전하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 안에 있지 않겠는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하나님의 제단을 쌓으라는 메시지는 말씀에 순종하라는 강력한 울림이다.

늘 번잡하고 시끌벅적한 타작마당이 은혜의 장소가 됐던 데에는 회개와 순종으로 단을 쌓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답은 분명하다.

회개와 순종이 없는 예배는 아무것도 아니다.

타작마당이 광장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점을 보면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타작마당을 모임 장소로 사용했고, 아이들에게는 그저 놀이터일 뿐이다. 이곳에 제단을 쌓아야 비로소 의미 있는 장소가 된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다시 복음으로 나아가자.

복음으로 교회가 새로워지며, 복음으로 세상을 이롭게 되는 한해를 위해, 이번 명절 만큼은 야단법석에서 벗어나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는 성도와 한국교회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개신교 지면 매체 <평신도신문>에 중복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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