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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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 발행인 채영남
  • 승인 2022.01.0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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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말이 뜬구름 같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긍정보다도 비관적이면서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그만큼 현실에서의 삶의 질이 최악으로 추락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지난 2년은 코로나 팬데믹 시대로 불릴 만큼 전염병이 지배한 시기였다.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분야를 막론하고 안전지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감염병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은 전국민적인 운동으로 번졌고, 정부와 민간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방역시스템인 이른바 K 방역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백신 접종률도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일상 복귀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전국민적인 노력은 ‘위드 코로나’로 실현됐다.

사회적 거리 두기 완화를 통해 단계적 일상회복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기대’가 만들어낸 결과다.

기대가 컸던 것일까? 희망은 절망이 되었고, 절망이 분노로 표출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위드 코로나 시행 45일 만에 일상회복의 꿈은 산산히 부서졌다.

신규 확진자는 연일 최고치를 갱신했고, 위중증 환자 역시 급증하면서 병실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 초래됐다.

다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서로가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다. 거리 두기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업종 간 갈등도 커졌다.

오랜만에 맛본 ‘자유’가 다시 ‘통제’로 바뀌면서 허탈감 속에 사회적 갈등은 회복 불능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재앙의 연속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성경에서는 새끼 빼앗긴 암곰에 빗대어 설명한다.

잠언 17장 12절은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고 전한다.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라는 경고다.

모두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그래도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면, 다수의 사람들은 후자를 안전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새해가 밝았음에도 희망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끼 빼앗긴 암곰과 같은 ‘코로나’의 확산이 아니라, 미련한 일을 행하는 자들의 대처가 절망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겠는가?

코로나 시대에 소금과 빛으로 나아가야 할 교회와 성도가 시대적 희망으로 자리하지 못하는 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 존 칼빈의 말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은사를 주시는 분 대신에 은사를 숭배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면 무엇이 우상숭배겠는가?”라고 묻는다.

선택과 결정의 방향이 잘못됐다는 강력한 메시지다.

그렇다면 교회와 성도의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옳겠는가?

교회는 코로나 시대에 많은 것을 잃었다. 선교의 문은 닫혔으며,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도 급증했다.

복음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시대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데에서 초래된 결과다.

교회가 시대적인 과제를 풀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정답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오직 예수님, 오직 복음이다.

코로나의 암곰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복음 이외의 것을 찾는 미련한 자를 경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직 예수님’, ‘오직 복음’만이 한국교회와 자유 대한민국의 희망이다.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주신 귀중한 기회다. 어려울 때일수록 순결한 신앙의 힘은 더욱 빛을 냈다. 성도들은 위기일수록 힘을 모아 이겨낸 저력을 갖고 있다.

코로나 시대도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이겨내고 극복할 것을 믿는다.

우리, 시대의 등불로 다시 일어서자.

덧붙이는 글 | 개신교 지면 매체 <기독호남신문>에 중복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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