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귤화위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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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귤화위지, 안녕하십니까?
  • 발행인 채영남 목사
  • 승인 2021.07.1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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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의 귤을 회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을 가진 귤화위지(橘化爲枳).

중국 초나라 왕이 제나라 재상 안영을 초청해 나눈 대화에서 유래된 말로, 환경과 조건에 따라 사람을 선(善)하게도 악(惡)하게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때에 따라서는 남귤북지 (南橘北枳), 강남귤화위지(江南橘化爲枳)로 사용하기도 한다.

코로나와 1년 6개월을 함께한 한국교회를 보면서 귤화위지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몸 된 교회가 사회로부터 받는 평가가 극과 극인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예수님을 포도나무에, 그리고 우리는 가지로 표현한다. 그리고 결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밝힘과 동시에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전한다(요15:5).

분명,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몸과 하나 된 거룩한 자녀가 분명함임에도 교회에 대한 사회적 판단은 호의적이지 않다. 이뿐이랴. 교회가 바라본 교회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미움과 다툼, 대립과 분열로 신음하고 있는 것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가 서로에 대한 이해보다 비난으로 넘쳐난다. 화해보다는 싸움을 확대하거나 부추기는 추세다. 그런 교회를 향해 세상은 마음껏 조롱하며, 심지어 복음의 진실을 왜곡하는 분위기다.

옛말에 오이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치지 말라 했다. 매사에 조심성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일테다.

세속적 지혜도 이러한데,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와 성도들은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는 재앙의 때라 표현될 만큼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감추어졌던 민낯이 드러났다. 애석하게도 은혜의 구호로 포장한 폭력과 부흥의 미명으로 행했던 탐욕이 대부분이다.

교회 안팎에서 “교회는 자정능력을 잃었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은 이유다. 요즘 젊은이들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뼈 때리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교회 곳곳에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외치는 곳이 많음에도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는 까닭이다.

한국교회는 근묵자흑(近墨者黑)과 마중지봉(麻中之蓬)의 갈림길에 서 있다. 선택에 따라 귤이 될 수도, 탱자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시대적 요구에 따라 둘 중 어느 것이든지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복음의 외연 확대를 위해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세속화’를 부추겼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이뿐이랴. 세속화를 통해 맛본 성장의 달콤함은 ‘복음’의 다양성으로 치장되었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생산해낸 값싼 은혜들로 얼마나 많이 넘쳐나게 되었는가.

결국 세련되고 화려하게 포장된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그들 스스로가 고난을 피하며 인내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성경에서만 볼 수 있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애석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교회가 1년 6개월 동안의 코로나 시대에 이처럼 처참하게 무너지게 된 것을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 빛보다도 먹을 가까이한 결과이지 않겠는가(近墨者黑).

다시 예수님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다.

제 마음대로 자라버린 우리가 회복하는 길은 예수님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麻中之蓬).

한국교회여!

한국교회 성도들이여!

다시 예수님이다. 오직 예수님, 오직 말씀의 땅으로 옮겨 심어야 복음은 능력이 된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 화해와 용서가 박제된 활자에서 뛰쳐 나와 일상이 되는 행복한 대한민국과 천하만민.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덧붙이는 글 | 개신교 지면 매체 <평신도신문사>에 중복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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