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사이비] ⑤ 재림주 이단의 뿌리를 찾아서 - 김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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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사이비] ⑤ 재림주 이단의 뿌리를 찾아서 - 김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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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4.1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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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문
김백문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은 1940년대에 스승 백남주의 곁을 떠나 독자노선의 길을 걸어간다.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창립했고 ‘이스라엘 수도원(以生列 修道院)’을 이끌었다.

 

(1) 초원 김백문과 이스라엘 수도원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은 1917년 10월 19일(양력)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인의동 448번지(현재는 경북 구미시 인의동(仁義洞) 488번지)에서 고인이 된 김해 김씨 가문인 아버지 김광조(金光祚, 1881년 8월 23일 생)와 남평 문씨 문아지(1882년 6월 6일 생)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에 대한 학력은 정확하지 않다. 단지 일제 강점기 때 대구의 의전전문학교에 다니다 중퇴(3년) 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당시 김백문의 형 김이문이 함경북도 회령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김백문의 나이 만 17세가 되던 1934년 어느 날 경상도 음식을 찾아다니다 김백문은 회령에서 하숙하는 경상도 출신 김남조 여사를 만난다. 김남조는 1893년 태생으로 당시 일대를 전도 여행했던 황국주 일행과 교분이 두터웠고, 신비주의 기도파에 속하였으며 후에는 김백문의 조력자로 신앙의 어머니가 된다.

첫 만남에서 김백문의 비범함을 본 김남조는 종교에 관심이 없었던 김백문을 설득하여 기독교 신앙의 길을 걷게 하였다. 이때부터 김남조는 김백문의 ‘신앙의 어머니’격 역할을 하여 회령, 청진, 주을, 나남 등지의 신비주의 기도파들에게 김백문을 소개시켜 주었으며, 결국은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의 백남주에게도 소개되어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초원 김백문은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과 장좌동 성주교 생활을 통해 점점 신비주의에 몰입하였고, 1937년 즈음에 비몽사몽간에 ‘주(主)님을 만나서 자신에 대한 사명과 미래에 일어날 역사와 기독교의 난해한 성서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김백문은 성주교를 비롯해서 신비주의 집단들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시작하였다. 그래서 초원 김백문은 세 권의 저서(성신신학, 기독교 근본원리, 신앙인격론)를 남기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김백문은 함경도 방면의 신비주의 모임에서 알게 된 곽할다(郭割多) 여인의 딸 조선애(趙善愛)와 혼례를 치른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1940년 4월에 서울에서 ‘조선신학원’이 강의소 형태로 개원될 때 스승 백남주를 떠나 김백문이 여기에 학생으로 입학을 하게 된다. 김백문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과 ‘신령회’ 사건으로 조선신학원의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후에 감옥에서 나온 김백문은 김헌(金憲)이라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현재는 율곡리)에서 ‘야소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을 세운다.

1946년 3월 2일에 수도원에서 수도생들과 신도들이 특별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이 기도회는 2월 하순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기도회를 하던 중에 천지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38명이었고, 수년 동안 초원 김백문이 집회를 가는 곳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매년 이 날 3월 2일을 수도원에서는 ‘개천(開天)의 날’로 기념하게 되었으며, ‘신조내의(信條內意)’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스라엘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여름에는 흰 적삼을 겨울에는 검정 저고리를 입고 다녔다.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되면 흰옷을 입었고 며칠씩 금식하고 철야를 했다.

수도원을 시작한 지 2개월 쯤 되었을 때 문용명(현 문선명으로 개명함)이라는 20대 중반(25세)의 한 청년이 찾아왔다. 상도동 집회소가 생겼는데 간판은 ‘야소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 서울교회’로 달았고, 문선명이 자신의 집에서 신혼살림을 했다고 말하는 임남순 여인에 의하면 그때 자신의 나이가 16살이었다.

 

(2) 김백문의 종말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초원 김백문은 부산 동래로 피신하게 된다. 이때 문선명은 김백문이 1952년 부산 동래에서 피난 중 집필하던 원고 『타락, 복귀원리』를 보고 원고교정을 봐 드리겠다고 가지고 가서 6개월 이상 가져오지 않는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53년에 서울이 수복되자, 제자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 온 초원 김백문은 “이스라엘 자녀 된 맹세”라는 것을 선포하고, 목조 2층집에 ‘야소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 간판을 걸게 된다. 그리고 12월 25일에는 제1기 수사인 김정애를 신부로 맞아 “어린 양(羊)의 혼인잔치”를 치른다. 김정애는 1925년생으로 경주 김씨이며 모친의 이름은 조경선이다. 전처 조선애와는 1962년 4월 20일에 이혼을 하였다. “어린 양(羊)의 혼인잔치”는 스승 백남주가 원산 신학산에서 거행했던 “천국결혼 잔치”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으며, 초원 김백문 자신이 메시아임을 나타낸 것이다. 초원 김백문과 김정애 사이에서 아들 김택규(金宅圭)가 태어난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초원 김백문은 정릉 3동 산 1번지(현재는 정릉 3동 769의 5번지)에 있는 김정옥의 집으로 예배 처를 옮기게 되고, 간판을 “기독교 청수교회”로 명명하게 된다. 초원 김백문은 1990년 12월 20일 오후 5시 경에 사망하였고,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축현리에 있는 기독교인 공원묘지에 묻혀(묘번 3456번)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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