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② 길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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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② 길선주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19.06.2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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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길선주(吉善宙, 1869-1935)목사, 부흥사, 독립운동가(3·1운동 민족대표)사진=독립기념관 홈페이지.
길선주(吉善宙, 1869-1935)목사, 부흥사, 독립운동가(3·1운동 민족대표)사진=독립기념관 홈페이지.

 

“가장 영적인 성품을 소유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

- Lillias H. Underwood(1918)

 

“가장 유명한 한국인 목사…하나님께서 그의 나라 확장을 위해 위대하게 사용하신 목사”

- George T.B. Daivs(1910)

 

“오늘 한국교회의 정통 신앙”

- 송길섭(1987)

 

“한국교회의 아버지”

- 길진경(1980)

 

위의 글들은 길선주에 대한 평가이다. 당대에, 그리고 사후에 그에 대한 평가는 목회자로서의 그의 삶이 한국교회에 지속적이며 지대하게 기여했다는 증거이다. 1952년 <신앙생활>(信仰生活)의 길선주에 관한 글에서 김인서는 길선주의 “전도를 통하여 목사, 장로, 교사 800명이 배출되었고, 설교 2만 번 이상, 청강자 5백만 명 이상”이며, 그에게 “세례 받은 자 3천 명 이상, 연보시킨 전액이 30만 원 이상, 설립한 교회 60여 곳, 구도자 7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길선주의 영향이 당대 한국교회 전반에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삶은 단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1897년 안창호가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설립할 때 발기인이 되어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하였고, 1919년 3·1만세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 되어 일제 강점기에 민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교회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민족과 나라의 아픔에 동참하고 시련을 이겨내려고 시도한 민족지도자였다.

 

선교사들과 인연을 맺다

1869년 3월 25일 평안도 안주에서 출생한 길선주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연마하며 무(巫)와 선도에 심취, 입산수도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성장 중에 시력이 약해지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친구 김종섭이 시력이 약화된 그를 찾아와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성경을 전달했고, 그 책과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길선주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친구 김종섭은 그의 회심을 발견하고 당시 평양 널다리교회(후에 장대현교회로 발전)에서 시무하던 그래함 리(Graham Lee, 이길함) 선교사에게 그를 소개했다. 그래함 리 선교사에게 신앙 훈련을 받던 그는 마침내 1897년 8월에 세례를 받는다. 차남 길진경 목사가 1980년에 쓴 그의 평전 《영계 길선주》(종로서적, 1980)에 의하면 세례를 받을 때 길선주는 “아멘, 주 예수여, 나를 용서하여 주소서. 제 헌신을 받아 주소서.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하나님을 만난 길은 고향을 향해 가는 것만 같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뛰어난 영적 여정

세례를 받고 이듬해인 1898년 길선주는 마펫(S.A. Moffett,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해 평양 장대현교회 영수(領袖)로 임명되었고, 1901년에 개교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1902년 입학하였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 선교사 마펫, 그래함 리, 베어드(W.M. Baird, 배위량) 등에게 수학하며 청교도적 신학에 기초한 복음주의, 경건주의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길진경에 의하면, 이 시기에 길선주는 매일 기도제목을 정하여 그일정표에 따라 기도하며 신앙훈련을 했다고 한다. 그의 기도제목은 이러했다.

 

월요일: 오전 7:30, 식구를 위하여

화요일: 친족(신자, 불신자)을 위하여

수요일: 친구(신자, 불신자)를 위하여

목요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금요일: 교육기관, 자선사업기관을 위하여

토요일: 해외에 있는 동포와 혁명 유지들을 위하여

일요일: 국내교회, 국외교회, 세계교회를 위하여

 

그의 매일 기도제목에서 보듯 길선주는 ‘나라와 민족’, ‘혁명 유지들’, ‘세계교회’를 위한 기도를 이어갔는데, 길선주의 신앙이 개인적이며 개교회에 갇힌 것이 아니라 민족, 특히 억압당하고 있는 민족과 온 인류, 온 세계를 위해 기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적용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기도를 ‘매일 한 시간의 보통기도, 매주 사흘씩 금식기도, 매년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했으며, ‘성경을 매일 한 시간씩 읽음과 동시에 암송, 성경 연구와 집필을 하루에 3시간, 하루에 2시간 독서’를 통해 지성적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를 이어갔다. 길진경은 아버지 길선주가 ‘일생을 구약 전권을 30회, 이중 창세기와 에스더, 이사야서는 540회, 신약 전권은 100회, 묵시록은 만 독, 요한서신은 500회를 독파’했다고 전한다.

 

평양신학교. 사진=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평양신학교. 사진=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되다

1903년 원산의 부흥운동이 1906년 8월 재령으로, 그리고 1907년 평양으로 이어져 1월 6일 장대현교회에서 2주간 개최된 남자사경회에서 개회 첫날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길선주는 박치록 장로와 함께 사경회를 위한 새벽기도회를 실시했다. 로드스(H.A. Rhodes, 노해리)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1907년 남자들 반에서 길선주 조사가 설교하는 기간 중에 2,200명의 결신자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 길선주는 1909년 장대현교회에서 박치록 장로와 함께 새벽기도회를 이어가 이를 한국교회의 전통으로 정착시켰다.

1907년 조선장로교독노회 설립 시 길선주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 장로교 7명 목사(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양전백, 이기풍, 길선주, 한석진)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 중 한 사람으로 길선주는 1910년 9월 제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부회장으로,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 때에는 부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한국교회를 섬겼다. 총회장을 역임하지 못했지만 그는 전도자로, 성경학자로, 교수로, 부흥운동가로 한국교회를 위해 기여한 인물이다. 또한 길선주는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하며 기독교 교육사업도 이끌어 나갔다. 특히 길선주는 지도자 양성을 위한 주간, 야간학교를 설립하고 한글교육을 적극 추진하는 등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교육사업을 위해 교회를 개방할 것을 주장하고 실행했다. 신앙의 공적,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그의 태도는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민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민족대표 33인 회의장면. 사진=한국근대사사전.
민족대표 33인 회의장면. 사진=한국근대사사전.

한편 길선주의 생애는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식민화 시기와 맞물려 있다. 1894-1895년 청일전쟁, 1904-1905년 러일전쟁을 거쳐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쟁취한 일제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07년 정미7조약,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으로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하고 경험한 길선주는 위정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한편 신앙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에 직접 관여하게 된다.

1911년 길선주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반도 식민지배의 걸림돌이라고 판단한 이른바 서북지방에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일제에 협조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추방하기 위해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살해미수사건’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일제는 1911년 10월부터 약 600명 이상을 예비검속했고, 72종류의 잔혹한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 사건을 날조하여 389명의 혐의자 가운데 123명을 기소하고, 1912년 첫 공판에서 105명에 대해 유죄 판결을 했다. 길선주와 신민회 회원인 그의 장남 길진형은 일제의 예비 검속 때 체포되었고, 길진형은 이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1917년 사망한다. 장남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는 아픔을 겪었지만 길선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여 기미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었다. 비록 3월 1일 당일에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지방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여 33인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자진하여 체포된 후 1년 7개월 동안 미결수로 옥고를 치렀다. 이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1운동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절망감에 빠진 민중과 교인들을 위해 그는 종말론적 희망을 선포하며 일제의 압제로 고난당하는 민족에게 내세적 소망을 끊임없이 제시하였다.

끌려가는 105인 사건 관련자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끌려가는 105인 사건 관련자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길선주는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므로 교회가 존재하는 그 사회에 사랑을 보여야 한다고 믿었다. 길선주의 차남 길진경 목사는 “아버지 길선주 목사는 소박 청렴하였고, 민족과 교회를 위하는 마음에서 물질에 인색하지 않았으며, 맡은 일에 성심을 다하였다”고 회고한다. 교회의 지도자이자 민족의 지도자 길선주는 오늘 우리에게 이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삶으로, 선포로 보여준 가장 영적 성품을 소유한 한국교회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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