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자유의 어목혼주(魚目混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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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자유의 어목혼주(魚目混珠)
  • 발행인 채영남
  • 승인 2021.01.29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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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채영남 목사
발행인 채영남 목사

코로나 바이러스가 국내에 유입된 지도 1년이 됐다.

2019년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원인불명 폐렴환자 27명이 발생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에서도 2020년 1월 20일 첫 번째 확진자가 발생했다.

국내 확진자 발생 이후 정확히 1년이 되는 지난 20일, 국내 총 확진자만 7만 3,518명, 사망자는 1,300명이나 된다.

지난 1년은 코로나 시대라고 정의할 만큼 감염병에 모든 사회적 관심이 집중됐다. 이 과정에서 갈등이 증폭되고 혐오와 폭력도 사회적으로 일정정도 용인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동안 정부의 감염병 대응 전략을 보면 ‘사회적 거리두기’ 만으로도 얼마든지 코로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회적 거리두기는 세계적으로 인정될 만큼, 그리고 성공한 K 방역을 논할 때마다 등장하는 용어다. 뿐만 아니라 당국의 접촉자 추적 시스템은 여러 나라에서 벤치마킹할 만큼 감염병 확산 저지에 대단한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코로나 종식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확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현실이다.

잠복기를 계산하여 2주간만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어느 순간 ‘고문’이 됐다는 볼멘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 이유다.

2주의 희망으로 버틴 지 벌써 1년이다.

1년의 기간은 우리의 생활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규범을 비롯해, 바른 판단의 기준이 되는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변했다. 이 때문에 현재의 시기를 코로나 시대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코로나 시대는 갈등이 혼재된 혼돈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계층과 세대간의 갈등이 구체화 되었다. 심각하게는 폭력이라는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볼 수도 있게 됐다. 감염병의 확산이 특정 계층이나 세대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에서 비롯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류가 목숨으로 쌓아온 ‘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생존을 위해 ‘통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됐다. 힘들더라도 코로나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이 과정에서 종교, 특히 개혁교회에 대한 혐오와 폭력은 당연시 됐다.

지난 1차 대유행이 대구 지역의 신천지 다대오 지파, 2차는 광화문의 집회, 3차는 경북 상주의 열방센터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을 두고 여론이 곱지만은 않다.

그동안 정통교회에서는 신천지를 주요교단이 이단 사이비로 규정해 우리와 다르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2차 당시에는 보수적이면서도 일부에 해당되는 것이라며 부정했다. 3차 역시 열방센터는 교류금지 또는 예의주시에 해당되는 단체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 과정에서 행정력은 종교행사에 대해 제재를 가해왔다. 사상 초유의 ‘비대면 예배’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코로나 확산의 진원지로 ‘교회’가 사실상 지목된 셈이다. 방역당국의 이같은 제재조치는 지지하는 여론이 강한 것에서 오는 일종의 자신감이기도 할 것이다.

천부인권, 또는 헌법이 보장하고 부여한 인간, 그리고 종교의 자유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는 그야말로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1년, 사회는 ‘자유’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다. 3단계에 준하는 강한 방역 지침에 따라 업종마다 희비가 엇갈리면서 나온 현상이다.

생존이 위협받게 된 업체마다 방역 지침을 ‘통제’로 보면서 ‘자유’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동안 모범적으로 방역지침을 지켜 온 교회가 주장한 ‘신앙의 자유’를 두고 ‘이기주의자들’이라는 비판으로 맞섰던 그 갈등이 다른 모습으로 표출되는 모습이다.

모두가 ‘자유’를 들고 나섰다. 생존을 위한 자유다. 그러나 자유의 외침이 어목혼주로 비춰지는 것은 왜일까?

마치 물고기의 눈과 구술이 섞인 것처럼 진짜와 거짓을 구분하기 어렵기만 하다. 듣고 있자면 모든 것이 다 진짜처럼 보인다. 그동안 그렇게도 거짓을 진짜로 믿고 속아 왔던 것처럼 말이다.

한국교회 역시 어목혼주의 코로나 시대에 갈지자 행보를 이어왔다. 모두가 진짜라고 했지만, 과연 그 속에서 진지하나 고민과 결단이 얼마나 있었을까?

참과 거짓이 혼재한 시대 속에서 교회가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어쩌면, 그동안 한국교회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오늘에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혁교회를 두고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치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그다지 틀린 것도 아닌 듯하다.

이제, 다시 예수님으로 회복해야 하는 이유다. 어목혼주의 시대에서 우리가 살 길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비록 손과 발이 묶여 억눌려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얻는 자유가 참 자유다. 그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참 평안이다.

이런 점에서 코로나 시대는 잃은 것이 아니다. 새로운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교회가 자정의 능력을 잃었다는 비판을 수 없이 들어왔다. 이제는 옳고 그름의 판단과 좋고 싫음의 감정을 떠나 교회 존립을 위해 자정해야 할 때다.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주신 마지막 기회라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시대는 중요하지 않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은가?

혼돈과 혼재의 시대인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명 지혜와 의로움, 거룩함과 구원이 되실 것을 믿고 나아가자.

 

덧붙이는 글 | 개신교 지면 매체 <평신도신문사>에 중복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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