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분쟁, 해법은 화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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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분쟁, 해법은 화해에 있다
  • 김지운 기자
  • 승인 2019.06.2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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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소식들이 빠르게 전파를 타고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은 커뮤니케이션 방법론의 다양화를 가져왔다. 다양한 소통 방식은 정보공개를 통한 투명성을 확보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반대 진영에서는 특정인이나 집단에 의한 정보의 독점이 가져오는 폐해를 지적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거짓된 정보의 확산으로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의 시각도 존재한다.

긍부정의 담론을 떠나서 소통기술의 발전은 한국교회 역시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는 사안들이 교회에 대한 불신을 확대 재생산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쉽게 말해 쉬쉬 하고 넘길 수 있는 문제도 크게 확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반면에 여러 사안들이 수면 위로 노출되면서 자성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능동적이면서도 적극적인 노력을 할 수 있게 된 면도 있다.

문제는 과거와 비슷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다 낭패를 보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각종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사안은 교회 수 만큼 다양하다.

목회지 대물림을 비롯해 담임목사직의 전임자와 후임자 간의 대립, 각종 의혹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파생된 문제는 교회 분쟁으로 확대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 양측으로 나뉘어진 진영은 서로 다른 논리로 대립하다 못해 폭력으로 확대되거나 교단법 또는 사회법으로 해결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이유를 떠나서 교회의 분쟁과 다툼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측면이 강하다.

당장 교회간의 다툼이나 비리 등과 관련된 기사에 달리는 수 많은 댓글들은 교회에 대한 혐오로 가득찬지 오래다. 또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가 ‘다툼과 분쟁의 대명사’가 됐다는 조소도 존재한다.

교회에 대한 사회의 혐오와 조소는 결국 선교활동의 장애로 작용한다. 교회가 싫어 교회를 다니고 싶지 않다”는 말들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는 점이 그 예이다.

교인이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가나안 성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시선은 교회에 그다지 곱지 않다는 의미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수습전권위원회나 화해조정위원회에 일말의 희망을 갖고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독교계의 대형 보수 교단인 예장 통합측은 교회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화해조정위원회를 신설해 운영해오고 있다. 이는 교단법이나 사회법이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경험에서 나왔다.

문제의 해결은 결국 ‘화해’와 ‘상생’, ‘협력’에 있다는 경험칙에서 비롯된 노력으로 평가받는다. 실제 교단내 대형 교회들의 분쟁으로 오랜 기간 대립각을 세우던 교회들이 하나 둘 해결되기 시작한 것을 두고도 ‘화해조정위원회’의 노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교회는 교회 본래의 기능에 충실할 때에 빛을 발휘하는 법이다.

‘사랑’, 그것도 그리스도 예수가 죽기까지 사랑했던 그 사랑이야말로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법이다.

교회 문제는 상호 입장의 차이로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던 교회가 노회 문제로 확대되고, 결국 총회와 사회법으로 진행되는 공통점을 보인다.

대립은 결국 갈등의 확대일 뿐이다. 적어도 교회 문제에서만큼은 그렇다.

교회의 선교를 위해서라기보다도,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사랑’과 ‘영혼구원’을 위해서 돌아선 서로의 얼굴을 다시 마주해야 할 때다.

서로를 향해 겨누었던 손가락을 펴서 마주 잡을 때에라야 교회가 다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흥의 새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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