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사이비] ④ 재림주 이단의 뿌리를 찾아서 -황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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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사이비] ④ 재림주 이단의 뿌리를 찾아서 -황국주
  • 임웅기 광주이단상담소장
  • 승인 2020.08.15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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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국주의 출생과 활동

황국주는 1930년대 초반에 출현한 자칭 메시아 중 한 사람으로 1909년에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고 아홉 살 아래인 누이동생 은자가 있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배재학교에 다니다가 부모를 따라 만주 용정의 은진중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용정에서 황국주 부친은 용정 중앙 장로교회의 장로로 봉사하였으며 ‘신행면옥(信行麵屋)’이라는 냉면집을 경영하였다. 유족한 환경 탓에 황국주는 서울로 와서 사직동에 있던 법률학원(또는 법정학교)에 재학한 적도 있다. 다시 용정의 집으로 와서는 용정 중앙 장로교회 유년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고 1930년에 아들을 낳았다. 황국주의 용모는 잘 생겼으며 열변가는 아니었으나 설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1929년에는 황국주는 용정을 떠나 100리(40Km) 정도 떨어진 발전된 블라디보스톡 지역의 모습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황국주가 신비체험을 했다고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블라디보스톡을 여행하고 난 뒤 인 1930년 또는 1931년 이었던 것 같다. 황국주는 자신의 신비체험을 고백하기를 30세 때에 백일기도(百日祈禱) 중 머리를 길러 내리우고 수염을 기르니 그 풍채가 그림에 나온 예수의 모습과 비슷하였다. 그 모양으로 교회(敎會)에 나타나서 ‘내가 기도 중에 예수가 나타나 내 목을 떼고 예수의 머리로 바꿔서 붙여주고 내 몸의 피를 예수의 피로 교체하여 투석시켜 주었다. 예수의 마음을 갖게 되었고, 예수가 보여주신 이적도 행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전부 예수화(化) 되었다’고 하였다. 이 내용이 바로 ‘목가름’이자 ‘피가름’ 교리이며 황국주의 제자 정득은을 통하여 통일교와 전도관 그리고 정명석에게로 이어져 오고 있다.

황국주는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을 모아 ‘새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길에 나섰다. 황국주와 신도들의 새 예루살렘 순례는 용정에서 출발하여 함경도를 거쳐 서울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함께 걸어갔으며, 가는 도중에 집회를 허락한 개신교 지역교회를 대상으로 부흥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난 황국주의 행렬은 1931년 7월경에 함남 흥원군 삼호교회 앞에 도착하였다.

황국주 일행이 조승제 목사에게 부흥회를 인도하고자 교회 강단을 내어달라고 하니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였다. 그래서 순례단은 남쪽으로 내려가 함흥을 거치고 원산을 거처 약수터로 이름난 삼방 방면으로 갔다. 황국주 일행이 원산지역에 도착했을 때 예수교회의 한준명이 이들을 만났고 황국주 일행은 삼방지역에서 흩어졌다고 한다. 황국주와 그의 신도들은 1931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쯤에 서울에서 이용도를 만났다. 이용도가 아현 성결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 쫓겨난 것이 10월 2일 밤이므로 황국주를 만난 것은 그 다음날인 3일에서 5일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서울에 도착한 황국주 일행은 서울, 황해도, 평안도, 경상도 등 전국 곳곳을 2-3명씩 짝을 지어 전도여행을 하였다. 황국주와 누이동생 황은자가 부흥집회를 인도하였으며 집회시간에 밀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기도를 했다. 집회를 통하여 병(病)이 나은 사람도 있고 부흥회 기간에 봉헌 한 헌금으로 예배당을 새로 건축한 교회도 있었지만, 가정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부녀들과 수종(隨從)드는 처녀들이 황국주를 예수같이 숭배(崇拜)하고 돈과 정조(貞操)를 바치며 음란(淫亂)한 집단생활을 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비난을 쏟아내었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목가름과 피가름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과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황당무계한 사건들을 종합하여 평양노회에서는 1932년 11월 28일에 한준명, 백남주, 황국주, 유명화를 이단으로 결의하고 부흥회 인도 금지를 하였다. 1933년에 들어와서 황국주는 전도여행과 부흥집회 인도보다는 ‘영계(靈界)’라는 월간지를 발간한다. 사장에 정중명(鄭重明)을 세우고 자신은 편집, 발행인이 되어 1933년 11월에 창간호를 세상에 내어 놓는다. 현재 창간호 한 부가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5층 희귀본 서고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2. 황국주와 이용도의 관계

황국주에 대한 기성교회의 반대와는 달리 이용도는 황국주에 대해 환영하는 입장을 취한다. 황국주가 1933년 11월에 평양(平壤)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원산 예수교회 이용도는 평양(平壤)에 있는 신도들에게 황국주에 대해 성자(聖者)라고 치켜세우며 맞이하자고 했으나, 신도들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황국주가 평양(平壤)에 들어오는 것이 무산된다. 황국주와 이용도의 관계가 친밀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다. ‘영계(靈界)’라는 월간지를 창간했을 때 이용도가 보낸 ‘축(祝) 창간(創刊) 주(主)로써 귀사(貴社)의 번영(繁榮)을 축(祝)합니다’라는 축전을 창간호 제2쪽에 실었다. 그리고 황국주는 제18쪽에서 20쪽을 할애해서 ‘이용도 목사는 이단인가?’라는 글과 끝부분에 ‘이용도는 주(主)의 사명(使命)을 다하고 안식(安息)의 나라’로 들어갔으며, ‘참 선지자(先知者)가 죽었다’고 이용도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며 애도(哀悼)하고 있다. 현재 월간지 영계(靈界)는 창간호만 전해지고 있다.

이용도의 임종 이후에, 황국주는 본처와 헤어지고 새 장가를 들어 용정에서 약 30리(12km) 떨어진 만주 조향천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황국주는 1952년 가을에 대구에서 추종하던 여자 2명을 첩으로 데리고 술장사를 하다가 43세 때에 죽었다고 한다.

 

임웅기 광주이단상담소장
임웅기 광주이단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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