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사이비] ③ 재림주 이단의 뿌리를 찾아서 -백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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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사이비] ③ 재림주 이단의 뿌리를 찾아서 -백남주
  • 임웅기 광주이단상담소장
  • 승인 2020.07.2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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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국내유입으로 반사회적이며 비밀스러운 활동을 전개해왔던 이단의 실체가 드러나게 됐다. 그동안 이단에 대해 무관심이었던 일반인들조차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내용에 경악했고, 많은 관심이 집중됐다. 관심이 집중될 수록 숨어들어가는 집단이 있는 반면,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단체도 있다.

한국의 이단 또는 사이비는 일반적으로 유사한 조직과 교리를 갖고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조직되고 소멸된, 그리고 현재도 명맥을 유지하거나 강력한 조직과 왕성한 포섭활동 등을 하고 있는 이단과 사이비는 뿌리가 같거나 비슷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단들이 그동안 정통교단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변질시켜 탄생시킨 주의 주장 또는 사상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도 어렵지 않다는의미다.

해피코리아는 갈수록 교묘해지고 지능적으로 변신하는 이단의 실체를 이해하고 대처하기 위해 광주이단상담소 임웅기 소장의 글을 연재한다.
원산예수교회.
원산예수교회.

 

원산 예수교회

초원(初園) 김백문의 스승이 되는 백남주는 함경남도 갑산군 출신으로 출생날짜가 1901년 1월 3일인데 김성도의 성주교회, 백남주의 원산교회,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 문선명의 통일교에서 예수의 탄생일로 지키는 날짜다. 백남주의 생일과 일치한다고 하니 논란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남주는 26세에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 뒤인 1930년 3월 12일에 동기 22명과 함께 제25회 졸업생이 된다. 신학교를 졸업한 백남주는 목회보다는 함경남도 원산으로 가서 ‘루씨 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다. 원산에 있던 이 학교는 중등교육을 담당한 개신교 미션학교로 의료시설 등도 갖추고 있었다. 백남주와 한준명은 처남매부지간으로 한준명의 누이 한인자가 백남주의 부인이므로 백남주와 한준명의 관계는 신앙을 넘어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이다.

(1) 원산 예수교회의 탄생

원산에서 백남주와 한준명이 스베덴보리(Swedenberg)의 저서를 읽고 여러 해를 기도하던 중 신(神)이 유명화에게 친히 임(臨)하여 대언하기를 “백남주와 한준명 그리고 박승걸이 1933년에 새 교회를 세울 것을 명(命)하셨다”고 한다. 유명화의 예언에 따라 백남주와 한준명이 먼저 나서서 기성교회와는 구별되는 새 교회를 창립하자는 움직임을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이호빈, 이용도, 이종현이 합류를 하게 된다. 1932년에는 한준명이 이용도의 소개장을 받아 평양을 방문하였고, 함께 동행 했던 여인 이유신을 집회 가운데 세워 강신행사를 하였다. 평양교계에서는 이 행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어, 결국 1932년 11월 28일에 임시회의를 열어 한준명, 백남주, 황국주를 각각 그 소속 노회에서 조사하기로 하였고, 한준명을 소개시켜 준 이용도 목사도 감리회 경성 지방회에서 조사하기로 결의를 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기성교단 측에서 이단으로 결의되어 제명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유명화를 필두로 기도모임을 계속하였고, 1933년 1월 3일 새벽에 모든 신도들에게 흰옷을 입고 백남주 자택으로 모이라는 전갈이 내려졌다. 그 날 새벽 3시쯤에 50-60명의 신도가 흰 옷을 입고 모였으며, 예배가 시작되었다. 백남주의 설교가 끝날 즈음에 유명화에게 주의 성령이 임재하여 영계(靈界)의 심판이 눈에 볼 수 있도록 모든 신도들에게 연출되었다. 그 자리에 흰 옷을 입은 신도들은 오른쪽으로 불려갔고, 그렇지 않은 신도들은 왼편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오른편과 왼편으로 분리된 신도들은 희비가 엇갈렸고, 대성통곡하고 있는 왼편에 있는 신도들을, 모두 흰옷으로 갈아입히고 왼쪽으로 합류시킨 후 회개와 구원에 대해 각인을 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교회’의 설립이 공표되었으며, ‘예수교회’라는 글씨는 ‘푸른 바탕에 흰 글씨로 쓸 것’과 가운데 ‘+(십자가) 표시는 붉은 색으로 하라’는 신탁이 있었다. 또한 1933년 1월 3일에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의 이름으로 “새 생명의 길”이란 제목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새 생명의 길이라는 선언문을 통해,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이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구원의 과정을 ‘삼시대’로 구분하는 것이다. 제1시대는 구약시대, 제2시대는 신약시대, 제3시대는 새 생명의 길이라는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1933년 6월 3일에 이용도, 백남주, 이종현의 이름으로 ‘새 교회 창립 선언서’가 발표된다. 6월 6일에서 6월 8일까지 평양교회에서 ‘예수교회의 창립공의회’로 모였다. 이 자리에는 116명이 참석했는데 여기서 총회장격인 선도감(宣道監)에 이용도를 선출하고 예수교회 헌장 및 그 세칙의 기초위원으로 이용도, 이호빈, 백남주를 선출하였다.

 

원산 석왕사 야유회. 앞줄 왼쪽이 백남주. 맨 오른쪽 이용도.
원산 석왕사 야유회. 앞줄 왼쪽이 백남주. 맨 오른쪽 이용도.

 

(2)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 설립과 백남주의 천국 결혼잔치

예수교회가 설립 된 후 1933년 9월 9일을 전후로 해서 백남주를 책임자로 하는 부설 수도원인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이 세워졌다. 그리고 1933년 11월 1일에는 중앙선도원(中央宣道院)이 평양에 세워졌으며, 오후 8시에 ‘예수교회 설립 선포식’을 거행한다. 백남주는 1934년 1월에 창간되는 기관지 『예수』의 편집책임을 맡게 된다.

1934년에 백남주는 매일 아침 2~3시가 되면 새벽기도를 한다는 명목 하에 여(女) 신학생 방에 들어가서 날이 밝도록 나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1934년 겨울에 백남주는 처녀와 새벽 3시에 눈길을 걸으며 천국결혼을 미리 연습하였다. 이런 일이 지나고 3~4개월 정도 될 즈음에 처녀는 임신을 하였다. 이 사건을 지켜본 예수교회 교직자들은 천국결혼잔치 사건의 장본인인 백남주와 처녀조필을 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백남주는 원산을 떠나게 된다. 이 때 따라나선 이가 있으니 초원 김백문이다.

(3) 김성도 ‘새주파’와 백남주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을 떠난 백남주와 처녀조필, 김백문은 1935년 봄 즈음에 김성도 ‘새주파’가 있는 평안북도 철산을 향하여 맨발로 걸어갔다. 또한 백남주는 김백문과 함께 새주파의 지교회를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강사가 되었으며 일제 탄압으로 곤혹을 치르던 ‘새주파’를 조선 총독부 종무과에 등록시키는 일에 앞장을 섰다.

1944년 4월경에 성주교는 김성도의 사망으로 장좌동 집회소가 방치되었고, 신도들은 사실상 뿔뿔이 흩어졌으며 김백문은 1940년대 초반에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서울로 이주해 와 있었다. 백남주는 원산의 루씨 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만난 유증소(柳曾韶)의 도움으로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 사범학교에서 백상조(白祥朝)로 이름을 바꾸고 교편을 잡게 된다. 백남주는 1949년 한 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어린 아들만을 남겨 둔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임웅기 목사(광주이단상담소장)
임웅기 목사(광주이단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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