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사이비] ② 재림주 이단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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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사이비] ② 재림주 이단의 뿌리를 찾아서
  • 임웅기 광주이단상담소장
  • 승인 2020.07.1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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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국내유입으로 반사회적이며 비밀스러운 활동을 전개해왔던 이단의 실체가 드러나게 됐다. 그동안 이단에 대해 무관심이었던 일반인들조차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내용에 경악했고, 많은 관심이 집중됐다. 관심이 집중될 수록 숨어들어가는 집단이 있는 반면,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단체도 있다.

한국의 이단 또는 사이비는 일반적으로 유사한 조직과 교리를 갖고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조직되고 소멸된, 그리고 현재도 명맥을 유지하거나 강력한 조직과 왕성한 포섭활동 등을 하고 있는 이단과 사이비는 뿌리가 같거나 비슷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단들이 그동안 정통교단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변질시켜 탄생시킨 주의 주장 또는 사상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도 어렵지 않다는의미다.

해피코리아는 갈수록 교묘해지고 지능적으로 변신하는 이단의 실체를 이해하고 대처하기 위해 광주이단상담소 임웅기 소장의 글을 연재한다.

임웅기 목사(광주이단상담소장)
임웅기 목사(광주이단상담소장)

① 철산 김성도의 새주파

#새주파와 교주 김성도

‘새주파’는 ‘새로운 주님을 믿는 교파’ 또는 ‘분파’라는 뜻으로, 김성도라는 여인을 ‘구세주’(메시야) 또는 ‘재림예수’로 추종하던 사람들을 지칭하여 불렀던 이름이다. 새주파의 창교주 김성도(金聖道, 여)는 1882년 7월 1일(음력)에 태어나 만 17세가 되던 해 자신보다 23세 많은 정항준(鄭恒俊, 40세)과 결혼했다. 그러나 33세쯤 김성도는 아들 정석천을 낳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평안북도 철산군을 전도 순례하던 노권사(이름은 불명)는 김성도를 보고 ‘예수를 믿어야 낫는 병이다’라고 했다. 그때부터 김성도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약 3개월 정도 되어서 정신이상 증세가 치료됐다.

그 사건이 일어 난 지 1년 뒤에는 아들 정석천이 병을 앓게 되자 김성도는 자신의 기도를 통해 아들의 병이 치료되는 경험을 한 후 기독교회에 정식으로 입교(入敎)하게 된다. 그러나 남편 정항준은 부인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심한 박해와 구박을 하였다. 정항준은 결혼 17년 만에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남편이 죽은 후 김성도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서의 난해한 문제를 풀기위해 노력을 하였다.

1923년 4월 2일(음력) 김성도는 기도 중에 입신(入神)을 한 후 처음 예수를 만나 예수로부터 “인류의 죄가 음란에서 비롯되었으며, 사람들의 불신으로 예수자신이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제거하라는 당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4월 12일(음력) 예수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재림주는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김성도 계시의 내용은 이후 이단들의 교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일을 따 먹은 것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남녀 관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 즉 음란이 타락의 동기가 됐다. ②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돌아가시지 않고 뜻을 이루어야 했다. ③ 하나님께서 2대 슬픔을 갖고 계시는데 그 첫째가 아담이 타락하는 순간을 아시면서도 간섭하시지 못하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으셨던 슬픔이고, 둘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어야 함에도 인간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보시는 슬픔이었다. ④재림주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⑤재림주는 한국으로 오시며 만인이 한국을 신앙의 종주국으로 알고 찾아오게 된다.

김성도는 계시의 내용을 기록한 후에 담임목사에게 말씀드렸더니, ‘사탄의 역사이니 자제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계시내용과 신비체험들을 교우들에게 알렸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김성도의 집에 출입하게 되자, 장로교단에서는 1925년경에 김성도를 징계하였고 소속교회에서도 그녀를 출교시켰다.

#새주파의 창립

출교당한 김성도는 자신의 집을 집회소로 만들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931년 2월에는 딸 정석현에게 “새 주님이 오셨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계시에 따라 온 가족이 사흘 동안 금식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계시를 통해 받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새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찬양하였다. 이 감사의 노래는 후손들에 의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당시 일제의 총독부는 한반도에서 자생한 유사종교를 끊임없이 탄압했다. 새주파는 1943년 가을 김성도와 두 아들 정석천과 정석진 그리고 신도 10여 명이 함께 구속되었다. 김성도는 심한 고문과 육체적 고통을 당한 뒤 3개월 만에 풀려났다.

#성주교 등록과 김성도의 죽음

김성도 새주파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원산의 예수교회 출신인 백남주와 김백문을 통해 1935년 10월경에 조선총독부의 종무과로부터 ‘성주교(聖主敎)’라는 이름으로 종교단체 등록을 허락받았으며 대표자는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 이름으로 했다.

그러나 김성도는 투옥기간 중의 고문으로 1944년 4월 만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음을 맞이할 때 김성도는 가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구원자를 보내 뜻을 이룰 것이며, 이 구원자는 음란집단으로 오해를 받아 핍박을 당하고 옥고를 치를 것이니 이 교회를 찾아가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후 새주파의 행적

6.25전쟁이 발발하자 평안북도 철산에 거주하고 있던 새주파 사람들은 거의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김성도의 딸 정석현과 정경옥(정수원의 누이동생)은 모친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고향에 남았다.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은 1944년에 경북 칠곡군에서 광산업에 손을 댄 후 대구에서 그의 가족들과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모친의 유언을 가슴에 간직 한 채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구원자’를 기다리던 김성도의 큰아들 정석천과 셋째아들 정석진 그리고 월남하여 부산에서 살고 있었던 맏딸 정석온은 일간신문에 난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가 어머니의 유언과 일치한다고 생각하여, 1955년 6월 25일에 통일교에 입교하게 된다. 정석진은 자신의 집(대구 봉산동 22번지)을 통일교 대구 집회소로 제공할 정도로 열심이었지만, 문선명의 첫째 부인 최선길이 비난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달라졌다. 결국 모친 김성도가 남긴 유언이 통일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 통일교를 떠나 거처를 제주도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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