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다망(公私多亡)의 시대, 어느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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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다망(公私多亡)의 시대, 어느 때까지
  • 발행인 채영남
  • 승인 2020.07.0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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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가 천만명이 넘어섰다. 확진자는 7월 5일 오전 9시 기준, 1,115만 3,713만명으로 조사됐다. 이 중 사망자는 52만 8,677명이다.

지난해 12월 31일 세계보건기구(WHO)에 우한에서 원인불명의 폐렴이 돌고 있아 27명의 환자가 나왔다고 보고한 이후 553일만이다. 지난 5월 20일에 전세계 확진자가 500만명을 넘어선 것과 비교해볼 때 불과 46일만에 500만명의 확진자가 추가 발생했다는 얘기다.

중국에 인접한 한국도 올해 1월 20일 처음으로 확진자가 나온 이후 질병본부에 의해 통제되던 코로나는, 한 달 뒤인 2월 19일 신천지 대구교회에서 집단감염 발생 이후 전국으로 확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정부의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감염병 대응 시책,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진정세에 들어가던 확진자는, 최근 물류센터와 무등록 방문 판매업체 등에서 발생해 지역감염으로 또다시 급속히 확산되는 추세다.

여론은 정부에 보다 강력한 조치를 요구하고 나섰다. 매일같이 주말 또는 휴일이 고비라는 당국 발표에 숨죽이며 동참했지만 이를 비웃듯이 발생하는 확진자, 그리고 몇 번의 위기상황을 겪으면서 강력한 통제 여론에 힘이 붙는 모양새다.

한국사회는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될수록 수면 아래 숨어있던 대립각이 표면화됐다. 특히 공공(公共)의 가치와 이해보다도 사적(私的) 실리를 더 우선시하던 신념 또는 욕구가 도전받게 됐다.

공(公)과 사(私) 중 어느 것을 더 우선에 두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분하다. 그러나 공(公)과 사(私)는 상호 보완될 때에서야 발전과 안정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데에 이견이 없다.

적절한 무게 균형을 이루던 두 사이는 감염병 확산으로 허물어졌다. 오히려 상황과 환경에 따라 혼란이 더 가중됐다. 공공의 가치와 이익은 경제위축 주장에 무력해졌고, 사적 영역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은 급증하는 확진자 수치에 전체주의에 가까운 ‘통제’가 유일한 답이라는 여론이 힘을 얻게 되는 일들이 반복됐다.

공(公)과 사(私)는 말 그대로 모두 망(亡)하게 되는 ‘공사다망(公私多亡)’의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패닉(panic)이다. 그동안 어렵게 쌓아온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개인의 생존을 위해 언제든지 포기하거나 짓밟아도 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또 생존을 위협하는 대상을 향한 온갖 혐오나 폭력이 용인되는 시대로 퇴보하고 있다. 점차 치유되고 화해되던 낡은 지역감정 또는 혐오가 대표적인 사례다.

머리카락의 2천분의 1 크기에 해당되는 매우 작은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아비규환이 아닐 수 없다. 잠복기 2주. 매주 15일 가량만 버텨내면 된다는 희망 하나로 버텨온 시민들은 새로운 확진자 발생과 함께 탄식도 늘어났다. 탄식은 어느새 절규가 되어 세계를 비탄에 빠지게 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비판과 원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세속적 이해와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니 이해가 될 법도 하지만, 때로는 사회와 구성원이 교회에 대해 기대하는 도덕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상식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일부 교회의 일탈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같은 분위기는 교회의 존립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예배’를 두고 ‘이기주의’와 ‘감염병 확산의 이유’로 지목하기도 한다. 치욕적이면서도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파생된 비판은 교회를 오직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는 악질적인 기업에 빗대어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최근 교회에서 발생한 감염병 확산을 두고 충분히 예상됐던 부분이라는 평가들이 대부분이다.

일반 사회의 언론이나 여론은 교회에 대해 낯설기 때문에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일반 사회와 다르지 않은 판단들이 다수라는 점이다.

‘예배는 곧 코로나 팬데믹(pandemic)이다’는 식의 해석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견해는 곧바로 집회(예배) 금지 조치 여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교회가 재난극복을 위해 참여한다는 명분 아래 스스로 교회 문을 닫게 되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예배는 세계적 재난을 방관하는 이기주의적이고도 몰상식한 행위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함정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의 예고되거나 한계가 명확한 일정 속에 살아가지 않는다.

이러한 속성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고난을 마주할 때에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한다. 지극히 감정적이면서도 왜곡된 정보나 군중심리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는 정부가 왜 ‘봉쇄’라는 강력한 제제를 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상식적인 원칙을 지키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질병을 통제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부가 보인 신뢰는 우리 국민들은 세계가 극찬할 만큼 원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대답했고, 이를 통해 질병관리당국은 감염병을 통제 관리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교회 스스로가 답 없는 논쟁인 ‘예배’ 진행 여부를 두고 찬반으로 나뉘어 다툴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몇 번의 위기와 확산은 국영방송인 KBS가 지난 1일 진단한 것처럼 ‘거짓말’과 ‘방심’이 불러온 참사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동안 ‘어느 때까지’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경은 고통의 시간에 대한 두 가지의 관점을 보여준다. 인간은 고통과 고난 자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하는 ‘어느 때까지’를, 하나님은 고통과 고난의 원인으로 지목된 행위의 지속 여부를 묻는 ‘어느 때까지’ 기록하고 있다.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크게 볼 때 이 두 가지로 나뉜다.

한국교회는 오늘날 고통과 고난을 마주하면서 하나님이 묻고 계시는 ‘어느 때까지’를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교회의 고통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자족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때문에 스스로 교회 문을 걸어 잠그면서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동참한다는 당위성으로 만족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감염병으로 고통 받는 공사다망(公私多亡)의 인류는 어디에서 길을 찾고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하는 것일까?

사회의 정책이나 과학기술로는 풀 수 없는 혼돈의 시대, 예배가 회복되어야 극복할 수 있다. 당연히 하나님이 물으시는 ‘어느 때까지’, 즉 교회와 사회가 마주한 고난의 근본적인 원인 해결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개신교 지면 매체 <평신도신문사>에 중복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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