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⑨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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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⑨ 윤치호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19.09.03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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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윤치호(尹致昊, 1864-1945)개화파, 제1대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尹致昊, 1864-1945)개화파, 제1대 독립협회 회장

 

어린 신동

좌옹(佐翁) 윤치호는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 신항리 신촌에서 무관 윤웅렬(尹雄烈)과 전주 이(李)씨 사이에서 1864년 12월 26일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선조 때에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후손으로 명문가였으나 가세가 기울어져 향반(鄕班)으로 몰락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윤취동(尹取東)이 아산 둔포면으로 분가 자수성가하여 대지주가 되었고, 아버지 윤웅렬이 무관으로 출세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그는 매우 부유한 가정 덕분에 100칸에 가까운 대 저택에서 생활하였고, 아홉 살이 되던 해에 한양으로 올라가 한학을 배웠다. 워낙 영특하고 글솜씨가 뛰어났기에 그를 가르친 김정언은 윤치호를 신동이라 불렀다.

 

일본 유학

1879년 15세에 진주 강씨 부인과 혼인한 윤치호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일본 유학은 부친 윤웅렬이 명석한 두뇌에 뛰어난 문장을 지녔지만 서얼로 과거의 길이 막혀 있는 아들을 적자로 입적하고 김옥균과 민영익에게 아들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물에 더 큰 관심을 보였으며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웠고, 영어도 틈틈이 익혔다. 일본에 있는 동안 동인사를 설립했던 나카무라와 같은 일본의 문명 개화론자들을 만나 가까이 지냈다.

 

갑신정변과 중국 망명

윤치호는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임명되어 미국 공사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여 고종과 개화파 사이를 오가며 교량 역할을 하였다. 청나라의 조선 내정간섭 배제와 미국, 유럽의 국가들과의 외교와 유대 강화를 주장했고, 각종 정치기구를 개편하여 백성들의 정치 참여와 참정권을 부여해 줄 것을 역설하였다.

윤치호는 1884년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개화파 인물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관계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 도착한 그는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미국 총영사 스톨을 찾아갔다. 스톨은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운영하고 있는 중서학원에 소개장을 써주었다. 상해에서의 그의 초기생활은 매우 불우했다. 사창가를 수시로 출입하는가 하면 얼마나 심하게 망가진 삶을 살았던지 그를 암살하려던 자객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그냥 되돌아가 다시 추격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기독교 신자로 거듭남

상해에서 방황하던 그를 붙잡아 준 것은 미국인 선교사였다. 윤치호는 미국 선교사의 설득으로 교회에 나간 뒤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중서학원에서 공부에 몰두한다. 그는 중서학원에서 영어, 수학, 화학 등을 수학하였고, 1887년 4월 3일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남감리교회 세례교인이 된 것이다.

 

미국 유학

감리회 교인이 된 윤치호는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 알렌의 주선으로 1888년 9월 28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한 윤치호는 밴더빌트대학 신학과에 별과생으로 입학하였다. 밴더빌트대학은갑부 밴더빌트의 기부로 1855년에 세워진 남감리회의 대학이다. 윤치호는 조선의 형편을 미국에 소개함으로써 남감리회가 조선에 큰 관심을 갖게 하였다.

1890년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윤치호는 조지아주에 있는 에모리대학에 입학, 캔들러 교수를 만난다. 그는 절약한 학비와 농장일 등으로 250달러를 모아 1893년 3월 조선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편지와 함께 캔들러 교장에게 전달하면서 “이것을 조선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할 기금으로 삼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윤치호의 행동에 감동을 받은 캔들러는, 코카콜라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자신의 형 아서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동생으로부터 윤치호와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들은 아서 캔들러는 윤치호가 건넨 돈의 10배의 금액을 남감리회에 선교헌금으로 기부했다. 이것이 마중물이 되어 미국 남감리회는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남감리회 선교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던 윤치호는 학업을 마치고 1893년 10월 하순 중국으로 돌아왔다.

상해 체류 중 남궁억을 만나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정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가사를 넣었다고 전해진다. 애국가의 작사자는 아직까지 미상으로 남아 있으나 윤치호와 안창호 중 한 사람으로 집약되고 있으며, 작곡자는 안익태이다.

 

조국의 복음화운동과 개화운동

윤치호는 고국을 떠난 지 10년 만인 1895년 2월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하자 즉시 자신의 집안에서 부리는 노비들을 석방시켰다. 또한 가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줏단지를 불태우고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통역을 하면서 기독교 선교를 도와주었다. 감리교 선교사 조세핀 애턴 캠밸이 교회와 학교 부지를 찾지 못할 때, 그는 아버지 윤웅렬을 설득하여 땅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윤치호는 민중들의 의식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독립협회의 회장일 때인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고, 헌의6조(獻議六條)를 결의했다. 1898년 5월에는 <독립신문> 사장 겸 주필을 담당하였다. 독립협회가 1898년 12월 정부로부터 강제 해산 당한 후 한성부 판윤 겸 한성부재판소 수반판사에 임명되었다가 견제 세력들에 의해 다음 해 1월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으로 전임되는 등 1903년 말까지 외직 생활을 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정부는 그를 중앙정부로 불러 외무협판과 외무대신 서리에 기용하였다. 윤치호는 외무협판으로 하와이와 멕시코에 있는 한인 이민자 실태를 파악하기도 하였으나 1905년 11월 17일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대한자강회 회장(1906년 4월), 한영서원(韓英書院) 원장(1906년 10월),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1906년 12월), 기호흥학회 교육부장(1908년 3월),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의 회장(1908년 5월), 평양대성학교 교장(1908년 9월), 청년학우회 회장(1909년 2월) 등 다양한 활동으로 민족 복음화와 개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윤치호의 삶은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기독교 신앙인 이전의 삶과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삶으로 대별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윤치호에게는 다른 인물들과 구별되는 부분이 있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그의 삶이 한일합방 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는 민족 계몽과 복음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친일적 행보이다. 그의 삶은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였다.

윤치호가 친일적으로 전향한 것은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고문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의 최고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는 가혹한 고문과 함께 옥고를 치르고 나오던 1915년 친일로의 전향을 선언했다. 이후부터 그는 새문안교회의 건축 공사비에도 거액을 헌금하는 등 기독교 복음운동을 활발히 벌이면서 조국의 독립운동과 함께 친일 행보를 걷기 시작했고, 점차적으로 친일 행보로 삶의 무게중심이 기울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저서로 《우스운 소리》·《영어문법첩경》이 있고, 역술서로 《찬미가》, 번역서로 《의회통화규칙》·《이솝우화》(伊索寓話)·《걸리버여행기》 등이 있다.

뉴욕시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윤치호 작사의 육필본 애국가. 미국 뉴욕시립도서관.
뉴욕시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윤치호 작사의 육필본 애국가. 미국 뉴욕시립도서관.

 

글 김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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